팀 의구심은 의성 어르신들의 이동권 문제를 탐색하던 중, 정자 할머니를 만나게 되었다. 정자 할머니는 의성읍에 거주하는 80대 어르신으로, 실버카(보행보조차)를 항상 사용하고 계셨다. 할머니에게 실버카는 걷기 위한 지지대이자, 장 본 짐을 나르는 운반 수단이며, 지치면 앉아 쉬는 의자였다.
"이거 없으면 나는 못 다녀. 다리가 후들후들해가 지팡이로는 안 되고, 이거 잡아야 걸을 수 있어."
정자 할머니의 하루를 따라가 보니, 실버카가 일상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아침에 실버카를 끌고 집을 나서 정류장까지 걸어가고, 버스를 타고 읍내에 나가 장을 보고, 병원에 들르고, 다시 버스를 타고 돌아온다. 이 모든 이동에 실버카가 함께했다.
의성에서 실버카는 흔한 물건이었다. 장날이면 실버카를 끌고 나온 어르신들이 버스 정류장에 줄을 서고, 시장 골목을 누빈다. 실버카는 의성 어르신 일상의 일부였고, 생존의 도구였다.
그런데 팀 의구심은 한 가지 이상한 장면을 목격했다. 버스에 오르는 어르신들이 실버카를 정류장에 두고 탄다는 것이었다. 접어서 들고 타는 분도 있었지만, 많은 분들이 정류장 한쪽에 실버카를 세워두고 맨몸으로 버스에 오르셨다. 그리고 목적지에 도착하면 다시 맨몸으로 내려서 실버카 없이 걸어야 했다.
"버스에 이걸 어떻게 가지고 타노. 계단도 높고, 접어도 무겁고. 그냥 여기 세워놓고 타는 기라."
이 장면을 보고 팀 의구심은 두 가지가 궁금해졌다. 실버카 없이는 걷기 힘든 분들이 왜 버스에 실버카를 가져가지 못할까? 그리고 목적지에 내린 뒤에는 실버카 없이 어떻게 다니실까?
팀 의구심은 정류장에서 목격한 장면이 일부 어르신만의 문제인지, 아니면 많은 분들이 함께 겪는 문제인지 확인하기 위해 대규모 실태 조사에 나섰다. 의성읍과 주변 면 지역의 마을회관, 복지관, 경로당, 오일장, 버스 정류장 등을 돌며 실버카를 사용하는 어르신 87명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87명 중 51명(58.6%)이 실버카를 실제로 사용하고 계셨다. 절반이 넘는다. 의성 어르신에게 실버카는 주요 이동 수단이었다.
팀 의구심이 5개월간 의성에서 만난 어르신은 54개 마을, 164명에 이른다. 실버카를 쓰는 분들의 평균 농사 경력은 61.4년이었다. 평생 논밭에서 몸을 쓴 만큼 허리·무릎·관절이 성한 분이 드물었다.
실버카를 쓰는 이유를 물으니, 답은 세 가지로 모였다.
실버카가 필요한 3가지 이유
1. 보행 지지 — 다리가 불편해 잡고 걸어야 한다
2. 짐 운반 — 장본 짐, 병원 약 봉투 등을 실어 나른다
3. 휴식 — 지치면 접어서 앉거나 걸터앉아 쉰다
실버카와 지팡이를 나란히 놓고 보면 차이가 뚜렷했다.
| 구분 | 실버카 | 지팡이 |
|---|---|---|
| 보행 지지 | 양손으로 잡아 안정적 | 한 손, 불안정 |
| 짐 운반 | 바구니에 짐 적재 가능 | 한 손 사용 불가 |
| 휴식 | 앉아서 쉴 수 있음 | 쉴 곳을 따로 찾아야 함 |
"지팡이는 한 손이고 흔들려. 이거(실버카)는 양손으로 잡으니까 안 넘어져. 장 볼 때 짐도 여기 넣고."
"다리가 아파서 오래 못 걸어. 그라면 이거 펴가 앉아서 좀 쉬다 가고. 지팡이는 그게 안 되잖아."
그런데 조사를 진행하면서, 팀 의구심은 정류장에서 본 장면을 숫자로도 확인했다. 버스를 이용하는 어르신 중 상당수가 버스에 실버카를 가져가지 못한다고 답했다. 접어서 들고 타기엔 무겁고, 계단이 높고, 다른 승객에게 방해가 될까 봐 눈치가 보인다는 것이었다.
팀 의구심은 이 문제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정자 할머니의 외출 하루를 처음부터 끝까지 동행하기로 했다.
팀 의구심은 정자 할머니의 장날 외출에 동행했다. 집에서 출발해 정류장까지 걷고, 버스를 타고 읍내에 가서 장을 보고, 다시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전 과정을 시간대별로 기록했다.
정자 할머니는 실버카를 끌고 집을 나선다. 정류장까지 약 10분. 실버카를 잡고 천천히 걷는다. 도착하면 실버카를 정류장 한쪽에 세워둔다.
버스에 오를 때 실버카를 두고 탄다. 높은 계단을 맨몸으로 올라야 한다. 손잡이를 잡고 간신히 오른다. 약 25분간 실버카 없이 이동.
읍내 정류장에서 내린다. 실버카가 없다. 맨몸으로 시장까지 걸어야 한다. 중간중간 벽을 짚거나 멈춰 서서 쉰다. 시장 안에서도 지팡이 하나에 의지해 짐을 들고 다닌다. 약 30분간 실버카 없이 활동.
장 본 짐을 들고 다시 정류장까지 걸어간다. 버스를 타고 돌아온다. 약 20분간 실버카 없이 이동.
정류장에 세워뒀던 실버카를 되찾는다. 짐을 싣고 실버카를 끌며 집으로 돌아간다.
75분실버카 없이 걸어야 하는 '공백 구간'
버스를 타는 순간부터 돌아올 때까지, 실버카가 가장 필요한 순간에 실버카가 없다
75분. 정자 할머니가 외출 중 실버카 없이 보내야 하는 시간이었다. 짐을 들고 걸어야 하고, 낯선 곳에서 지지대 없이 움직여야 하는 바로 그 순간에 실버카가 없었다. 팀 의구심은 이 시간을 '실버카 공백구간'이라고 이름 붙였다.
"시장에서는 벽을 짚고 다녀. 없으면(실버카 없으면) 다리가 후들거려가 오래 못 서 있어."
같은 어려움을 겪는 분이 많았다. 실태조사 결과, 실버카 사용자 51명 중 46명(90.2%)이 외출 시 버스에 실버카를 가져가지 못하고 있었다.
칸 하나가 실버카 사용자 한 명이다. 51명 중 46명(90.2%)이 버스를 탈 때 실버카를 정류장에 두고 갔다.
46명. 실버카 사용자의 90.2%가 버스를 탈 때 실버카를 두고 가고 있었다. 실버카 공백구간은 정자 할머니 한 분의 불편을 넘어 읍내에서 되풀이되는 문제였다.
그렇다면 왜 버스에 실버카를 가져갈 수 없는 걸까?
버스 계단이 높아서 실버카를 들고 오를 수 없고,
버스 안에 실버카를 놓을 공간이 없고,
다른 승객들에게 방해가 될까 봐
눈치가 보인다.
핵심은 장날이었다. 의성 오일장이 서는 날이면 버스가 가장 붐비고, 어르신들도 가장 많이 움직인다. 장을 보러 읍내에 나가야 하고, 장 본 짐을 들고 돌아와야 한다. 실버카가 가장 절실한 날, 정작 실버카를 가져갈 수 없다.
저상버스도 살펴봤다. 하지만 의성에는 저상버스가 극소수였고, 운행 노선도 제한적이었다. 전국적으로 농어촌 지역의 저상버스 보급률은 도시에 비해 현저히 낮다. 보급이 늘기를 기다리기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실버카 무게는 평균 8kg, 농어촌버스 계단은 30cm 안팎으로 두세 칸이다. 허리·무릎을 앓는 어르신이 8kg을 들고 그 계단을 오르긴 버겁다. 그래서 실버카는 정류장에 남는다.
팀 의구심은 실버카 공백구간을 해결하기 위해 두 가지 방향에서 솔루션을 시도했다. 첫 번째는 버스를 바꾸는 것, 두 번째는 실버카를 바꾸는 것이었다.
버스 내부에 실버카 전용 짐칸을 만들면 어떨까? 팀은 버스 내부 공간을 측정하고, 실버카를 접어서 수납할 수 있는 거치대 설계안을 그렸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버스 운행사와 논의한 결과, 버스 내부 구조를 변경하려면 차량 안전 인증을 다시 받아야 했고, 비용도 막대했다. 무엇보다 장날 만석이 되는 버스에 짐칸 공간을 내려면 좌석을 줄여야 했다. 좌석이 줄면 어르신들이 서서 가야 하는데, 그건 오히려 더 위험했다.
시도 1 — 실패 버스 구조 변경은 안전 인증, 비용, 좌석 감소 문제로 현실적으로 불가능
그렇다면 실버카 자체를 바꿔보자. 더 가볍고, 더 작게 접히는 초경량 실버카를 만들면 버스에 들고 탈 수 있지 않을까?
팀은 시중에 나와 있는 초경량 실버카를 조사하고, 어르신들에게 보여드리며 의견을 들었다. 결과는 부정적이었다. 가벼우면 불안정하다. 의성의 비포장 도로, 농로, 경사진 골목에서 가벼운 실버카는 흔들리고 쓰러지기 쉬웠다. 또한 접이 구조가 복잡해 어르신들이 혼자 접고 펴기 어려웠다.
"그거 너무 가벼우면 바람 불면 날아가뿌지. 내가 잡고 서 있어도 흔들흔들하는데 그걸 어떻게 믿고 다니노."
시도 2 — 실패 초경량 실버카는 불안정하고, 접기 어렵고, 비포장 도로에서 사용 불가
두 번의 실패 후, 팀 의구심은 출발점으로 돌아가 물었다. 왜 실버카를 버스에 가져가야 하는가?
버스도 실버카도 바꾸기 어렵다면,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봐야 했다. 지금까지 팀이 붙들고 있던 질문은 '버스에 실버카를 어떻게 태울까'였다. 팀은 문제를 한 줄로 다시 적었다.
문제의 핵심은
'목적지에 실버카가 없다'는 것이었다.
다시 보니 이것은 '이동의 자율성', 나아가 '존엄'의 문제였다. 어르신들이 실버카 없이 벽을 짚으며 걷고, 남의 눈치를 보며 짐을 끌어야 하는 상황. 한 사람의 존엄이 깎이는 순간이기도 했다. 실버카가 없는 75분 동안, 어르신은 혼자 힘으로 움직이기 어려웠다.
해답은 뜻밖에 단순했다. 실버카를 가져가지 못한다면, 도착지에 실버카가 이미 있으면 된다.
팀 의구심은 '도착지에 실버카가 있으면 된다'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해, 공유실버카 서비스 '구르미'를 설계했다. 구름처럼 가볍게, 어르신의 발이 되어드린다는 뜻을 담았다.
어르신들이 버스를 타고 읍내에 도착했을 때, 정류장 근처에서 실버카를 빌려 쓰고 돌아갈 때 반납하는 서비스.
자전거 공유 서비스(따릉이)의 원리를 실버카에 적용한 것이다. 다만, 어르신 대상이므로 앱이 아닌 대면 대여 방식으로 운영한다.
핵심: 실버카를 가져가지 않아도, 도착지에 실버카가 기다린다.
구르미의 운영 방식은 의성 어르신들의 생활 패턴에 맞춰 설계되었다.
어르신들이 버스에서 내려 가장 먼저 가는 곳은 장, 병원, 농협이다. 그 동선의 시작점인 남부농협 앞에 대여소를 두었다.
스마트폰 앱이 아닌, 대면으로 대여한다. 어르신이 이름과 전화번호만 적으면 실버카를 빌리고, 돌아갈 때 반납한다. 앱도 QR도 필요 없는 아날로그 방식이다.
의성 오일장 날에 맞춰 오전 시간대 집중 운영. 어르신들의 외출 패턴에 맞췄다.
수요 조사를 바탕으로 5대를 배치. 회전율을 감안하면 충분한 수량.
2025년 10월, 팀 의구심은 의성읍 남부농협 앞에서 공유실버카 구르미의 시범운영을 시작했다. 장날 오전, 실버카 5대를 대여소에 배치하고 어르신들을 맞이했다.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93%의 만족도, 100%의 재이용 의향. 그리고 평균 43분 만에 대여와 반납이 완료되었다. 어르신들은 실버카를 빌려서 장을 보고, 병원에 들르고, 돌아와서 반납했다. 그 과정이 자연스러웠다.
"아이고, 이거 있으이까 참 좋다. 맨날 이 앞에 세워놓으면 안 되나?"
"장에서 짐 넣고 밀고 다니이까 다리도 안 아프고, 시장 구석구석 다 다닐 수 있었어."
"다음에 또 있으면 좋겠다. 매번 있으면 참 좋겠는데."
특히 눈여겨볼 지점은 경제성이었다. 팀 의구심이 운영 비용을 직접 추정했다.
실버카 구매비, 대여소 설치비, 인건비 등 포함. 1회 이용당 약 6,900원 수준.
연 약 1,000만원으로 1,440회의 이용이 가능하다는 것은, 어르신 한 분의 존엄한 이동 한 번에 약 6,900원이 든다는 뜻이었다. 저상버스 도입(대당 2억원 이상)이나 도로 인프라 개선에 비하면 훨씬 적은 비용으로, 바로 효과를 낼 수 있었다.
구르미는 거창한 설비가 필요 없다. 정류장 한 곳, 실버카 다섯 대, 관리 인력 한두 명이면 장날에 바로 시작할 수 있다. 의성에서 검증한 운영 방식을 그대로 전한다.
| 이용 대상 | 보행보조기구 실버카 이용 어르신 |
| 운영 일자 | 장날 (오일장) |
| 운영 장소 | 읍내 주요 버스 정류장 인근 (오일장 인근) |
| 운영 시간 | 7~15시 |
| 대여 비용 | 무료 |
| 대여 절차 | 대여소 방문 후 이름·전화번호 작성 |
| 관리 인력 | 1~2인 |
| 초기 실버카 | 최소 5대 |
대여소 1곳에서 8시간 운영(오일장) 기준. 대여소가 한 곳 늘면 그만큼 더 많은 어르신이 읍내에서 실버카를 쓸 수 있다.
노인 이동권은 소외된 의제다.
교통 취약지역, 대중교통 소외, 이동 불편. 이런 말들은 뉴스에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실버카를 버스에 가져갈 수 없어서 장날에 벽을 짚고 걷는 할머니'의 이야기는 어디에도 나오지 않았다. 정책의 언어에는 노인 이동권의 이런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면이 담겨 있지 않다.
팀 의구심이 의성에서 본 것은, 실버카라는 작은 물건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어르신들의 일상 전체였다. 실버카는 지팡이보다 안정적이고, 짐을 나를 수 있고, 앉아서 쉴 수 있는, 어르신의 독립적인 일상을 받쳐주는 핵심 도구였다. 그 도구가 사라지는 75분 동안 어르신은 하루 중 가장 취약한 시간을 보냈다.
구르미는 도착지에 실버카를 비치한다.
그것이 전부다.
그 단순한 방법으로 75분의 공백을 메웠다.
구르미의 가치는 문제를 정확하게 본 데 있다. '도착지에서 실버카가 필요하다'는 것. 이 한 줄을 찾기까지 두 번의 실패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르신은 돌봄을 받는 사람을 넘어 이동의 주체였다. 누군가 부축해 데려다주는 대신, 스스로 실버카를 빌려 장을 보고 돌아오는 것. 구르미는 어르신에게 그 주체성을 돌려드리는 서비스였다.
팀 의구심은 이제 구르미를 의성 너머에서 함께 운영할 파트너를 찾는다. 정류장 한 곳, 실버카 다섯 대, 이름과 전화번호를 받아 적을 관리인 한두 명이면 장날에 바로 시작할 수 있다. 의성에서 두 번의 오일장으로 검증한 운영 가이드라인을 그대로 전한다.